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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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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와 헨델, 그 영원한 평행선 -글 장우형이사

관리자l2013-05-06l 조회수 4659


바흐(1685~1750)와 헨델(1685~1759), 그 영원한 평행선

    

존 테일러 경(John Taylor) 이라고 알려진 안과의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1750년 바흐, 그리고 일년 후인 1751년 헨델의 눈을 수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일에 헨델이 바흐의 수술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았다면 아마도 절대로 수술을 테일러에게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사(테일러 경)는 금방 죽인 비둘기의 피(!)를 바흐의 눈에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그리고 설탕 혹은 부엌에서 사용하는 소금용액을 사용하였다. 수술 후 상처(눈)에는 커다란 동전(!)과 반으로 자른 사과(!)를 대고 붕대로 감았다.” (출처: Bach-Lexikon, Laaber)

    

바흐는 테일러 경의 수술 후에 -혹은 수술로 인해- 장님이 되었고, 헨델은 이미 장님이 된 후에 테일러 경의 수술을 받기는 하였지만, 테일러 경이 이 두 명의 음악의 대가가 장님이 된 사연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  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바흐와 헨델을 연결하는 것은 비단 두 사람이 장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 두 장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엄청난 창조적인 의지를 발휘한 것으로도 말 할 수 있다. 바흐가 마지막까지 손을 대었던 작품 중 하나는 유명한 푸가의 예술(Kunst der Fuge BWV 1080) 인데, 바흐의 아들 C. P. E. Bach의 말을 빌리자면 “바흐의 이름(B-A-C-H)의 이름이 대위법 적으로 다루어지는 푸가에서 그는 돌아가셨다.”

헨델이 장님이 되는 순간 까지 작곡하였던 곡은 오라토리오 “예프타”(Jephtha) 이다. 합창곡 “주님의 결정은 얼마나 매서운지요(How dark, O Lord, are Thy decrees)" 의 중간 쯤에 남긴 헨델의 메모는 다음과 같다.

“1751년 2월 13일 여기까지 왼쪽 눈의 이완 현상으로 말미암아 (작곡하였다)” (Bis hierher kommen den 13. Februar 1751, verhindert worden so relaxt des Gesichts meines linken Auges.)

영어 가사의 dark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단어인데 그의 눈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결코 우연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의 합창곡은 “당신의 결정은 항상 옳으십니다!” 라고 말하고 있고, 그의 음악은 장 단조를 거듭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병에 실망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졌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같은 해에, 거기에 같은 독일에서 태어난 바흐와 헨델의 인생길을 살펴보면 서로 반대되는 많은 부분을 살펴 볼 수 있다. 바흐는 일생을 거의 교회음악을 위해 살다가 마지막에 가서 세속적인 위대한 작품들 - 클라비어 연습곡, 평균율곡집, 음악에의 헌정, 푸가의 예술 - 을 작곡한 것에 비해, 헨델은 일생을 거의 오페라와 대규모 기악곡의 작품을 쓰다가 말기에 가서 종교적인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야 등등 - 을 남겼다. 헨델의 오페라가 “울게 하소서”가 나오는 “리날도” 외에는 오늘날 거의 외면당하고 있지만, 그의 오라토리오 메시야, 혹은 예프타 등은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예프타의 맨 끝에 적혀있는 헨델의 메모는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다.

“Soli Deo Gloria. Georg Friedrich Handel aetatis 66. Finis Agost. 30. 1751”

“오직 주님께 영광!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66세. 1751년 8월 30일에 끝내다”

    

많은 독자들은 이 Soli Deo Gloria (오직 주님께 영광!)가 바흐의 작품의 끝머리를 장식하였던 것 - S. D. G. -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두 거장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고리를 발견한 것이다.

    

바흐와 헨델이 자라난 도시와 가문, 그리고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그들이 보여주는 음악적 성향을 어느 정도 가늠 할 수 있다.

    

J.S.바흐는 헨델이 태어난 26일 후인 1685년 3월 21일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가족에서 태어났다. 그 식구들은 튀링엔(Thueringen)에서 주로 시 음악가나 오르가니스트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이제나흐(Eisenach)시에서 지휘를 하는 훌륭한 음악가였는데 아이제나흐라는 도시는 아주 작은 공작(Herzog)이 관리하는 도시이고 그 도시는 작센지방과 튀링엔 지방에서 상당히 특색이 있는 도시였다. 바흐의 인생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7살에는 라틴어를 하는 학교에 들어가야 했고 8년 후에는 중학교를 마치고 그 후에는 오르가니스트나 시음악가에 필요한 공부를 하고 그 공부가 끝나면 전통적인 직업을 갖고 식구들이 일했던 지방에서 일을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전혀 다르게 되었다.

    

세바스치안은 대단히 우수했다. 7세에 라틴학교에 다녔는데 그는 1학년이 아닌 2학년으로 입학했다. 원래 한 학년을 2년씩 다니게 되어있는 규칙에도 불구하고 3학년을 1년만 다녔다. 바로 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한해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50세 생일이 돌아오기 몇 주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1년 이틀 후에 돌아가셨다. 이 일로 해서 세바스치안은 오르드루프(Ohrdruf)라는 곳에서 오르가니스트를 하고 있는 큰 형 크리스토프(J.Christoph Bach)를 따라 이사를 갔다. 전학을 오고 학년을 뛰어넘은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세바스치안은 4학년을 최우수학생으로 마쳤다. 그래서 8년 과정을 5년 만에 끝냈으며 5학년과 6학년은 합해서 일년 만에 마쳤다.  바흐는 수능시험을 마지막으로 교육과정을 끝내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그는 17세의 나이로 쟁어하우젠에 있는 야콥교회의 오르가니스트에 취직하여 그의 직업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G.F.헨델은 1685년 2월 23일에 자알레(Saale)에 있는 할레(할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는 때에 할레시는 큰 변화 속에 있었다. 16세기부터 대주교의 공관이었고 후에는 막데부르크(Magdeburg) 대주교의 행정관이었던 기능을 5년 전에 이미 사라진 후였다. 베스트팔렌(Westfalen)평화조약에 의해서 마지막 행정관이 죽음과 동시에 대주교구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의 선제후(Kurfuerstentum)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아직은 관리청이 상당기간동안 이 도시에 머무르게 되지만 이미 죽은 아우구스트(August)공작의 아들인 요한 아돌프(Johann Adolf) 1세가 1680년에 공관을 바이센펠스(Weissenfels)로 옮겼는데 바이센펠스는 아우구스트 공작이 1656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관의 성격은 후에 두개의 새로운 기관, 즉 공공의 기관과 개인기관으로 바뀌어졌다. 그 공공기관은 대학인데, 이 대학은 1690년에 만들어져서 1694년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고 그 후에 현대적인 대학으로 급격히 발전 했다. 개인기관으로는 청교도의 지도자인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ke)의 집회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 도시는 공관이 떠난 후에 겪는 어려움을 격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작센지방의 통치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통치로 넘어가는 과정이 도시와 시민들에게는 많은 적응력을 요구했다. 바로 이러한 변화 속에 있었던 것이 바로 헨델이다.

    

헨델의 아버지는 할레의 근방에 있는 기비헨스타인(Giebichenstein)에서 공무원으로서의 외과의사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브란덴부르크 통치자의 궁중의사와 그 집의 주치의를 담당하였고, 한편으로는 옛날 작센지방의 통치자와 그의 아들의 궁정의사와 개인 주치의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위치 때문에 그는 1688년부터 적어도 두 달에 한번씩은 바이센펠스에 있는 요한 아돌프(Johann Adolf) 1세 공작을 방문했어야 했다.

    

헨델의 아버지는 아들의 직업으로 법학을 택했다. 아마도 그에게 성공적인 궁전에서의 캐리어를 가능케 하기위해 정한 것 같다. 하지만 아들은 음악에 재능과 관심을 보였다. 이것은 식구들에게 상당히 새로운 것이었고 그래서 비슷한 찬스를 갖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모습에 선뜻 적극적으로 임해주지 못했다. 이런 아버지의 소극적인 태도는 아들로 하여금 음악으로 캐리어를 쌓도록 도와주었고, 이는 궁전에서 법학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좋은 일이었다.

    

작센-바이센펠스의 공작이 헨델의 아버지에게 음악적인 재능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해 주었다. 그리하여 아들은 할레의 마르크트(Markt)교회에 있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호우(Friedrich Wilhelm Zachow)라는 오르가니스트에게 배우게 된다. 헨델이 베를린 통치자의 궁전에 간 여행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이루어졌는데, 아버지는 1697년에 74세의 나이로 죽었다.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가 헨델에게 이탈리아에 가서 배울 것을 제안했지만 헨델은 그것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장학금을 받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떤 계약을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헨델은 이러한 관계를 피하고 스스로가 결정해서 발전하는 것을 원했던 것 같다.

    

그의 17번째 생일이 되기 직전인 1702년 2월에 헨델은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돔(Dom: 주교가 있는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하여 자신의 직업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바흐와 헨델은 모두 17세경에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라난 배경은 너무나도 달랐다. 헨델은 비교적 대도시에서 여러 가지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나 세상이 넓은 줄을 알고 있었고, 또한 출세라는 세상적인 잣대에 익숙해 있었던 반면에, 바흐는 비교적 조용한 배경에서 자라나, 출세보다는 정직하고 꾸준한 삶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는 그런 삶을 살아온 것이다. 유럽이 중세 때부터 가꾸어온 삶의 목표가 결코 오늘날과 같은 “행복추구”가 아니라 “종교적 구원 혹은 정신적인 안정”이 먼저였음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들 유럽인 들은 그런 이상을 가졌었기에 기사라는 새로운 계급을 탄생시켰고 - 귀족의 귀한 아들들이 일신의 영화를 한 칼에 버리고 험난하고 위험한 순례의 길을 택했던 것, 혹은 수도원 이라는 기독교 문화를 통하여 “소유의 행복” 보다는 “종교적 구원”의 길을 택했던 것을 생각해 보라 -  이런 배경이 훗날의 바흐를 형성한 것이다.

음악적인 면에서도 이러한 배경은 여실히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 헨델의 음악은 장조에서 화려하고 단조에서 비통한 전형적인 감성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바흐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바흐가 작곡한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의 다섯 번째 곡인 “나, 당신을 어떻게 맞이하리오(Wie soll ich Dich empfangen)" 는 그가 마태수난곡에서 사용하였던 단조풍의 곡이다. 바흐에게 있어서 단조는 감성적인 헨델처럼 비통한 의미라기보다는 엄숙한 것, 품위 있는 것이요, 장조는 헨델의 그것처럼 화려한 것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벰보가 이탈리아의 유명한 시인 페트라르카 -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김소월에 해당하는 시인 - 의 시집 Canzioniere 를 출판하면서 그의 시에서 추구했던 두 가지 반대되는 특성, 유쾌함(piacevolezza)과 근엄함(gravita)을 이야기 했던 것과 상통한다. 벰보가 Canzoniere를 출판한 1501년대가 바로 선법이 조성으로 바뀌는 시점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바흐가 얼마나 전통적인 양식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는지 알 수 있다.

    

흔히들 말하기를 헨델은 “바로크 작곡가”이고 바흐는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라고 한다. 그 말은 헨델은 그 작품이 전적으로 바로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어서 마치 사람들이 골동품을 아끼고 사랑하듯이 헨델의 작품을 아끼고 사랑하고, 한편 바흐는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까지 그 예술성을 증명하며 구조적인 불멸의 현재성을 구현하였다는 뜻이다. 아무리 현대의 작곡가라 하더라도  바흐의 완벽한 구조성을 구시대의 유물로 여길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20세기 작곡가 베베른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구조적이며 형식적인 완벽함은 아마도 바흐 작품 외에는 견줄 것이 없을 것이다. 이렇듯 현대의 12음기법과 음열주의 등의 음악들이라 할지라도 바흐가 보여주었던 구조와 형식상의 완벽성은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계속 추구되었던 이상(理想)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가(史家)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헨델의 작품은 이해하기 쉬운 음악이고 바흐의 작품은 복잡하고 힘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왜 그럴까?

어떻게 보면 헨델의 음악은 마치 화려한 장미와 같고 바흐의 음악은 속이 꽉 찬 배추 같다고 할 수 있다. 속이 꽉 찬 배추는 겉의 한 장씩 잎을 벗길 때에 비로소 얼마나 알찬 배추인지를 알 수 있고, 아름다운 장미는 잎이 떨어질 때마다 빈약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잎이 떨어지기 전에는 배추와는 비교가 안돼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흐의 음악은 그 구조와 형식상에서 자신의 품격과 가치를 발휘하지만 헨델의 음악은 사무쳐 오는 바로크적인 단순성과 감성의 아름다움이 그 빛을 내고 있다는 말이다.

    

바흐의 칸타타 61번 “크신 주여 오소서(Nun komm, der Heiden Heiland!)” 의 첫 곡인 서곡(Ouverture [Coro])과 헨델의 메시야의 첫 곡 Sinfonie 를 비교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구조적 혹은 감성적인가를 볼 수 있다. 물론 이 두 곡이 장르 상 서로 같다거나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것은 아니지만 두 곡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표현하는 면에서는 상통하는 면이 있다. 바흐의 칸타타 61번은 대강절 첫 주, 즉 교회력상의 첫 주에 맞추어 작곡된 곡이고, 헨델의 메시야 첫 곡 Sinfonie 는 순서상 3부작 중 첫 부분의 테마인 “탄생” 혹은 “주님의 오심”에 맞추어져 있다. 헨델의 신포니는 기악만으로 작곡 되어 형식상 진정한 서곡의 형태를 보이고 있고, 바흐의 서곡은 말이 서곡이지 사실 독창과 합창과 어우러져서 약간은 예외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두 곡이 다 느리게 시작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으나 바흐가 “느림-빠름-느림”의 프랑스식 서곡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해, 헨델의 그것은 “느림-빠름” 의 구조여서 바로크의 전통적인 구조에서 벗어나는 모습이다. 바로크의 서곡은 보통 륄리가 주도 하였던 프랑스풍의 “느림-빠름-느림” 구조와 이탈리아풍의 “빠름-느림-빠름”의 구조를 갖고 있는데 프랑스에서의 모든 서곡, 그것이 발레를 위한 것이었든 오페라를 위한 것이었든 왕의 입장과 더불어 연주되었었다는 사실, 즉 왕의 입장을 의미하는 느리고 위엄 있는 악풍을 보여주어야 했었다는 사실과, 이미 왕과 귀족의 문화적 의미가 쇠퇴 되어버리고 새로이 등장한 시민계급이 오페라의 진정한 소비자가 된 이탈리아의 문화적 배경을 안다면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바흐가 칸타타 61번 첫 곡에서 선택한 구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랑스풍 서곡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심을 왕이 등장하는 느리고 위엄 있는 템포로 시작하여 표현하고 이어서 합창이 시작하면서 시민의 템포인 빠른 템포를 보여주고 이 모든 것을 다시 느린 템포로 마무리하여 진정한 새 역사의 시작이 도래하였음을 구조, 형식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헨델은 사람들이 오래 생각해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의 신포니는 서곡의 자리에 놓여있지만 서곡의 구조를 표방하지 않았다. 곡은 프랑스풍의 Grave 로 시작하지만 역동적인 빠른 악장으로 넘어간 후에 다시 숨이 넘어갈 듯하며 뜻 모를 느린 부분을 선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느리고도 감미로운 “내 백성을 위로하라!” 라는 테너 솔로를 내어 놓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생각인가? 헨델에게 있어서는 왕의 위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왜 세상에 오셨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주님은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백성에게 자신의 피로 위로를 베풀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느린 템포가 가지는 형식적인 의미보다는 느린 템포가 갖는 감성적인 요소를 택한 것이다.

    

현재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당시 혹은 후대의 모든 사람이 바흐를 복잡하고 힘들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라이프찌히의 토마스 교회 장로들은 바흐가 너무 복잡하고 듣기 힘든, 은혜가 안돼는 음악만을 만든다고 그를 협박하고 월급을 깎기도 하였지만 유명한 카를 마리아 베버는 전혀 다른 판단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스승인 포글러(Georg Joseph Vogler, 1749-1814)의 코랄편곡과 바흐의 코랄편곡을 비교하면서 바흐가 너무 단순하여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하였다.

   

위의 악보가 바흐가 편곡한 “너무 단순하여 자연스러움을 잃은” 코랄 “내 마음의 이유에서(Aus meines Herzens Grunde)”이다.

    

아래의 악보는 베버가 “예술성이 높으며 화성의 진행이 매우 자연스럽다”고 표현한 그의 스승 포글러가 행한 같은 코랄의 편곡이다.

   

바흐와 헨델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시대와 입장 혹은 자신의 판단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한 시대 - 바로크 -,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같은 땅위에서 살면서 이토록 유명하고, 서로를 알면서도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서로를 존경했던 - 바흐는 헨델의 Brockes-Passion을 거의 완벽히 필사하면서 연구 하였다 - 음악가는 흔하지 않다. 서로 비슷하건 다르건 그들이 남긴 위대한 음악적 유산은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엮어주고 있다.

바흐와 헨델은 마치 병행하는 기찻길과 같다. 한번도 만나는 일 없지만 언제나 함께하고 있고, 닮았지만 같지 않다. 그러나 그 영원한 병행선이 있기에 음악이라는 열차가 달릴 수 있었으리라!

    

- 끝 - 

글쓴이: 장우형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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