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이해 (장우형교수)

관리자l2005-03-21l 조회수 10118



음악의 이해
(본 내용은 한국교회음악협회 뉴스레터 2004년 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장우형이사
독일 뮌스터대학 음악학박사
현, 성결대학교 겸임교수

  독일에서 음악학(Musicology)을 공부할 때 이야기입니다. 저의 음악학 전공 담당 교수이셨던 브로코프 교수는 여러모로 참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러시아어와 영어, 라틴어를 비롯해 외국어에 능통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지식수준은 거의 “걸어 다니는 사전”이라 해도 좋을 만큼 방대하였고 또한 독일 음악학 학자 중에서 유일하게 정식 의사면허를 갖고 계신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뮌스터 대학교에 음악치료학을 개설하는 산파 역할도 하신 분입니다. 그녀의 강의는 학생들 뿐 아니라 교수들과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어서 항상 머리가 희끗희끗 하신 분들도 강의를 즐겨 듣곤 하였습니다. 학자로써는 더할 나위 없이 존경 받는 분이었지만 여자로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신 것이 흠이었는데 예를 들면 즐겨 입고 다니시는 가죽외투는 항상 어딘가가 실밥이 터져 있었고 머리는 짧게 다스렸지만 파마를 한건지 아니면 자다가 그냥 나오신 것인지를 알아내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한번은 교수님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의 정원은 -그것을 정원이라고 부른다면- 단 한번도 정리한 적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잡초는 자라서 허리까지 올라와 있고 나무들은 정원수라고 부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저를 돌아보면서 “어때, 멋있지?” 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얼떨결에 “아, 예....”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제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이 인식 할 수 있는 “음악적인 틀”에 듣고 있는 음악을 끼여 맞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장단조와 화음에 익숙한 사람은 그런 틀 안에 있는 음악을 이해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20세기의 현대음악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음악입니다. 새로운 음악이 나타날 때마다 이러한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의 싸움은 항상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어 왔습니다. 바로크 음악 초기의 몬테베르디의 새로운 양식인 모노디에 대한 인식이 그랬고, 베토벤의 전혀 새로운 소나타 방식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20세기의 쇤베르크에 의한 12음 기법처럼 화음을 조직적으로 붕괴시키고 형식적인 아름다움만을 강조한 음악 등은 아직도 많은 사람에 의해 배척되는 “음악을 위한 음악”, “예술을 위한 예술”만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시 브로코프 교수의 정원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봅니다. 브로코프 교수의 정원은 그것이 정원이라는 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지저분하고 형편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사실 산에 올라가 보면 그러한 “브로코프 교수의 정원”은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산에 잡초가 아무렇게나 나있다고 우리가 “여기 참 지저분하군” 하고 말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더 이상 잡초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이며 신의 섭리이고 또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한사람인 헝거리 태생의 리게티(Ligeti Gyogy 1923-  )가 작곡한 곡중에 Atmospheres(분위기라는 뜻)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곡에서 그는 그의 대표적인 작곡방식인 “음향작곡”이라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방법은 여러 악기가 조금씩 틀린 음정과 방법으로 비슷한 음형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비슷한 음형들이 한꺼번에 울리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음향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는 이런 방법을 여러작품에서 시도합니다. 그의 피아노 곡을 보면 어떤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4개의 하행음계가 끝없이 반복합니다. 이 하행음계는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약 우리가 산속에서 일렬로 늘어선 나무나 풀을 본다면 과연 어떨까요? 그런 것을 보고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부르짖을까요? 그런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자연이라고 부를수도, 신의 섭리라고 혹은 우리의 근원적 모습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멀리서 숲을 바라보면 그것은 비슷하지만 절대로 같지 않은 여러 나무들의 모습입니다. 리게티의 작품이 그러했듯이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내던 “질서”와 “틀”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분명 어떤 다른 종류의 질서와 틀은 존재하지만 말입니다.

브로코프 교수의 정원이 나에게 보여준 것은 새로운 인식의 출발이었습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먼저 나의 틀을 깨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이해하는 것,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내 자신에 대한 “작은 희생”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