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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학술포럼 2009년 전통적인 예배의 교회음악- 그 당위성과 변화의 필요성/ 이문승교수

관리자l2009-06-29l 조회수 13963


전통적 예배의 교회음악-그 당위성과 변화의 필요성
                                      이문승(작곡가, 서울신학대학교 교회음악과)



       목차
       1. 머리말
       2. 살려야 할 전통성과 변해야 할 요소들
       3. 몇 가지 보완사항
          1) 한국교회는  ‘예배보다’, 예배드리다‘ 개념의 절충이 필요하다.
          2) 예배 성가합창곡의 가사
          3) 오르가니스트도 현대예배를 대비해야.
          4) 창작이 기초가 되는 각종 프로그램들  
       4. 맺는 말



1. 머리말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노래하기를 즐겼다. 중국정사인 이십오사( 二十五史)의 기록 중에는 고대 한국인의 공통점 하나를 말할 때 ‘어울리면 노래하고 춤춘다’는 낙천기질을 들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양반들도 시조나 가곡을 한 곡 쯤  구성지게 부를 줄 아는 것을 멋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로 남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이후의 유교(儒敎)에서 체계화된 예악(禮樂)사상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옛 우리의 선조들은 예(禮)와 악(樂)은 항상 같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특히 악을 중시하였다.
  선비들이 생각하였던 음악은 철학적 사고와 통하는 것이었다. 고상하고 품격 높은 음악을 가까이 하는 것을 멋스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한국인의 오랜 정서에는 좋은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음악적 습관과 음악적 감성이 선비들의 가슴에 깊이 자리했다.
  한편 이러한 생각은 서양음악사의 그리스 시대 음악관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스의 Ethos 음악관이 바로 그것이다. 좋은 음악은 인간들의 삶과 인격 형성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택하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교회음악에서는 그러한 생각을 적용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교회음악이나 교육용 음악은 잘 조직된 프로그램과 절제된 감정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선율의 구성에 있어서 반음계는 물론 증 음정과 감 음정은 피하였고 예배음악은 신학적, 음악적으로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후기 산업사회가 되자 시민사회가 발달하면서 개인의 존엄성이 더욱 부각되고 실용주의와 대중성이 중요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즉 컴퓨터와 통신 그리고 대중매체가 급속도로 발달함에 따라 정보의 개인화, 세계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게 되고 세대 간의 모든 격차가 무너져 버렸다. 변화된 사회에서는 매스콤을 중심으로 대중성이 크게 부각되자 대중들을 끌어 들이려는 다양한 방법을 활발히 연구하였다. 결국 ‘반복하라, 중독성은 음악성을 이긴다‘는 글 제목처럼 상업적 목적에 의한 심리를 이용한 방법들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세속성과 밀착된 방법으로 대중에게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교회음악에서도 회중성과 관련하여 “교회음악은 대중음악이었다”, “지금의 대중음악도 미래에는 고전음악이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깊은 뜻은 찬송의 회중성을 말하는 것이지 대중음악과의 구별을 무너트리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회음악의 특징과 유형 그리고 그 구조와 효과에 대한 깊은 연구도 없이 전문가들에 의하여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만 개인의 기호에 의존하여 음악이 선택된다면 흥미 중심으로 기울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음악의 질적 평가를 고려하지 않고 있어 교회음악의 음악적 기준을 무너트리게 된다는 점이다.
요즈음 우리 주변을 보면 음악이 세대 간의 갈등을 더욱 조장되고 있다.  요즈음 범람하고 있는 대중적 요소의 음악들은 수단에 대중가요적인 음악의 요소에 기독교적 가사의 내용만을 붙인 음악이다. 이것을 예배찬송이라고 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선별된 음악을 듣는 것에 대하여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음악에 있어서 회중은 직접 참여자이기 때문에 좋은 음악을 듣고 불러야 할 권리가 있다. 회중들은 들음에서 발전하고 행함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교회음악은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하다.

2. 살려야 할 전통성과 변해야 할 요소들

  1) 교회음악은 말씀과 음악의 아름다운 조화가 중요하다. 또 교회음악은 각 교회의 형편에 맞으며 교회음악 문화를 빛나게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 교회음악은 우선적으로 예배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준비하는 과정과 결과가 아름다우면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모두에게 흥미로워야 한다. 그래서 교회음악은 회중성과 예술성이 중요하다. 교회음악은 듣고 부르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로 이어지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찬양을 듣고 부름으로 인하여 직, 간접적으로 교육의 효과를 누리게 된다.
목회적 관점에서 보면 쉬운 것만 목표로 하기보다 교회음악 행위에서 보여지는 준비 과정이 다소 복잡하고 어려워도 예술성 있는 교회음악을 마련해야 교회는 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질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를 찾으시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교회음악은 예배의 효율성과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현대교회의 찬양에 대중음악적 요소를 유입시킨 결과 회중들의 참여가 늘어났다고 하지만 비전문인의 득세와 즉흥성으로 이어졌다. 젊은이들에게 어필하고 사람을 모으는데 목적을 두다 보니 예술적 아름다움은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어린이, 청소년과 나이가 드신 분들의 찬송가의 취향이 분리된 현상을 볼 수 있다.어린이들은 찬송가를 아예 안 부르기도 한다. 주일학교 성가대를 통하여 노래와 노래하는 마음을 배우고 모임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익히는 아름다움이 사라져 가고 있다. 또한 성인들도 합창하기 위하여 마음을 모으며 아름다움을 쌓아가는 즐거움도 잃어가고 있다. 오직 개인과 개인의 욕심과 흥미가 있을 뿐이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회 안에 전문적 합창단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돋보이는 교회들이 있어 참으로 감사하다.
선교 초기에는 거리를 돌며 북치고 나팔을 불며 전도에 힘썼다. 북이나 나팔은 야외전도의 효과적 도구였다. 실용성이 뛰어났고, 간편하고 소리는 우렁찼다. 선교사들로부터 소개된 서양음악은 우리들의 정서와는 달랐지만 당시로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한국 민족의 가슴을 뚫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대중악기를 사용하여 찬양인도자는 많은 군중을 회중 찬양으로 일사분란하게 이끈다. 시종일관 노래하며 뛰기도 한다. 청년들은 자유스러움 때문에 찬양과 경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또 성장하는 교회는 열린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2) 교회음악은 기독교적 특색과 효율성이 강조된 실용음악이어야 하되 가사와 음악이 신학적, 음악적으로 검증되고 선별된 것이어야 한다. 무분별한 음악과 가사는 회중들을 혼란스럽게 하여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한다.
가사의 검토는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선 작사자나 번역자가 잘해야 하겠지만  지도자나 목회자가 곡을 선곡할 때 반드시 가사를 미리 읽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표현법 미숙, 다른 종교적 용어 사용, 추상적 표현, 그리고 깊은 뜻 없이 의례적으로 반복되는 가사, 내용의 단순성 등은 선택하지 않거나 수정해야 한다. 쉽고도 효율적이며 내용이 있는 가사를 노래해야 한다. 회중들에게 가사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가사와 음악의 악센트를 맞추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예배에서는 음악이 빠르고 볼륨이 크다. 매스 미디아의 영향으로 의례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부르게 된다. 그래서 나의 고백보다는 대중에 의하여 끌려가게 되기도 한다. 주위에서 자주 불리는 CCM들을 살펴보면 음악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양적 성장 논리를 앞세워 세속성이 짙은 매체와 대중음악기법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면 양적 성장 이후에 부딪히는 새로운 질적 교육을 위한 노력 및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러야 할 것이다. 지금도 음악 양식이나 연주 매체의 차이, 그리고 대중음악적 환경과의 마찰 때문에 갈등하는 경우는 많다. 삶의 스타일이나 생각의 형태 그리고 질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복음성가나 대중음악의 요소가 가미된 음악행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 CCM이 어느 정도 활용되는 것은 필요하지만, 걸러지지 않은 음악인 줄 모르고 ‘찬양을 많이 하면 교회가 성장한다’고 생각하면 위험하다. 삶의 양식은 어떤 교회음악을 부르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대한 식별은 약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지만 객관적으로 쉽게 판별할 수 있는 점도 많다. 예를 들면 음역이 너무 높거나 낮은 것, 리듬의 변화가 지나치게 많거나 계속된 당김음, 곡의 길이가 지나치게 긴 곡, 선율의 진행이 부자연스럽거나 어려운 것, 그리고 음량을 지나치게 크게 하고 드럼세트와 심벌즈를 무분별하게 비음악적으로 두드리는 음향만 무성하게 울리는 연주 등이다. 영적 공감이 없는 흥미 위주의 이러한 시끄러운 상황들이 계속될 때 교인들을 당황스럽고 혼란에 빠지게 하며 쉽게 피곤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사상이 직, 간접적으로 표현된 다양한 실용적 교회음악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순박하면서도 다양하고 유익한 노래를 열정적으로 부르기 위하여 교회음악인들은  항상 교회음악을 교회음악답게 가꾸고 방향을 설정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장르를 기획하고 연출해야한다. 창작이 그 저변을 이루고 번성해야 교회음악이 근본적으로 발전한다.

  3) 교회음악 지도자들은 회중들이 듣기만하는 교회음악-찬양대만이 연주하는 상아탑적인 교회음악의 형상-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또 지나친 설교 중심의 예배도 안 된다. 춤과 연극, 가수공연이 일반화되고 있는 이 때 성가대가 성가곡 한 곡을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기 힘든 세상이다.
교회음악은 회중 찬송뿐만 아니라 복음성가, 찬양대의 찬양, 독창자의 솔로까지 모두 포함된다. 교회음악은 회중과 일체감을 위하여 반드시 회중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하고  회중의 이해 범주를 떠나지 않은 것으로 하되 품위를 잃지 않은 아름다운 것으로 가꾸어져야 한다.  
교회음악은 찬양대원 자신과 회중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음악지도자는 많은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며 좋은 음악의 선곡 및 연주 환경 조성이 중요하다. 회중들이 성가대의 찬양이 기대되도록 깊은 공감대를 이루어야 한다. 회중을 향하고 약간은 긴장감 있으며 밝고 힘찬 음악을 주로 하되 음악적 효과를 위하여 느리면서도 분위기 있는 음악과 절충해야 한다. 한 가지 종류의 음악은 인간을 목적지향으로 만든다. 그 연주 결과는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교회음악은 교회의 전통성이 존중된 회중성을 강조해야 한다. 회중성은 공동체다운 교회음악의 중요한 면모이다. 기법적으로 대중음악적 요소와 완전히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예배에 대한 효율성이 고려될 때 가능하다. 회중들이 교회음악 행위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참여하도록 교회음악 지도자는 교회음악 프로그램을 배려해야 한다. 그러기위하여 음악 양식 뿐 아니라 연주 양식 및 교육까지도 회중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회중들은 듣건 부르건 찬양시간이 기다려져야 하고 회중들이 찬양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배려가 필요하다.

4) 교회음악은 유행성이나 시대의 흐름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시대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신선한 음악의 소재와 그 방법은 새로운 멋과 흥미를 유발하므로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항상 교회음악 문화는 질적 향상과 새로운 변화가 필요로 한다. 현재, 우리 주변에는 교회문화가 세속적 문화에 비하여 너무 뒤지고 있으므로 기독교는 흥미를 잃고 있다는 지적을 하는 이도 있다. 교회음악 작품들이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 예배는 신선함을 잃는 요인이 될 것이다.
지금 시중에는 ‘세속음악 분야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법을 적용하여 음악을 만드는데 우리 찬송가는 오랜 시간에 걸쳐 불렀으므로 신선한 맛이 없어져  예배의 흥미를 잃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CCM이 한국교회에 지나치게 범람하게 된 이유 중에도 찬송가가 바른 기능을 하지 못한 것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정통적인 교회음악을 꿈꾸는 분들의 발 빠른 대처와 협조가 필요하다. 시대성에 뒤지면서 혼자 전통을 고수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화살은 당겨졌다. 많은 전통음악인들이 흥미를 끌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열심히 개발하든지 시대가 지나도 오랫동안 향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보여 주어 전통의 귀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과거에는 교회음악인들이 서양음악을 소개하고 이끄는 등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한국교회에 속하고 있는 훌륭한 인재들을 중심으로 하여 교인들을 대상으로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실용적인 많은 창작 찬송 또는 성가들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음악은 전통적 찬양에 대한 개념을 확대해야 한다. 사회 환경과 변화에 따른 새롭게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교회음악 프로그램에 대한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생활 속에서 자유스러우면서 다양하고, 쉽고도 짧으며 유익한 찬송을 많이 부르도록 생활찬송을 많이 개발하여 수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가사가 복음적이면서도 음악이 활기차며 흥미로운 편곡 방법을 많이 연구해야하며 그런 곡을 창작해야 한다.
1895년 베어드 부인(Annie L. A. Baird 1864-1916)이 찬미가에 수록하기 위하여 지은 찬송이 한국인들에게 반응이 좋자, 선교사들은 이 찬송이 전례 없이 한국인의 음악적 성향에 적중한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분석했던 일이 있었다. 쉽게 불리고, 교인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또 가르치기도 쉬웠기 때문이었다. 즉 한문에서 나온 어색한 말들 대신에 아주 평범한 일상 언어를 구사하여서 글 모르는 할머니까지도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찬송이 줄 수 있는 인도와 위로의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음악은 영성과 지성을 잘 살릴 수 있는 조화로운 것이로되  예술적이어야 한다. 세속음악적 요소는 검증이 필요하다.

5) 교회음악의 관점에서 보면 대중음악 안에는 함정과 독소가 있다. 한국교회는 이것을 반드시 짚고 극복해야 한다. 드럼세트 그리고 증폭된 마이크 장치는 교회음악을 대중매체로서 활용하는 도구이다. 이 도구들은 음량과 음질의 원색적 강함 때문에 다수의 군중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데 있어서 힘이 있으므로 그 점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악기는 한 인간의 영적 변화를 목표로 하기도 하지만 대중들의 일체감이나 군중심리 형성, 그리고 대중자체를 상대로 하므로 개인의 감정과 느낌이 무시되는 단점도 있다. 더욱이 예배에서 찬양인도의 수단으로서 드럼세트와, 증폭된 마이크의 큰 소리와 함께 감성의 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바꾸기도 한다. 비이성적인 사람에게는 이것이 군중심리로 작용하기도 하고 착각 현상을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이성적인 사람에게는 반감을 가지게 되거나 냉소하게 된다. 원색적 음악행위가 계속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은 극단적인 두 부류를 낳게 할 것이다.
드럼세트는 음의 크기가 클 수밖에 없다 포르테(f)가 많을 수밖에 없다. 피아노(p)가 감각적이고 소극적이라면 포르테(f)는 적극적이며 외향적 성향이 있으므로 포르테는 더 흥분을 조장한다. 음악은 중성이라 하여 같은 음악기법이라 해도 가사만 복음적일 때 교회음악이 가능하다는 말은 음악언어의 질서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우리들이 색을 선택할 때 원색에 대한 추구는 다른 색에 비하여 논리적으로 판단하기보다 좋아하는 경향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게 된다. 따라서 한쪽에 치우치기 쉽기도 하다. 문제점이나 무리한 점을 지적하여도 좋아하는 경향이 우세하여서 영향을 줄 수가 없다. 교회음악에 있어서는 화성과 악기의 사용을 이에 비길 수 있는데, 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음악에서의 원색적 사용은 원색적 사용은 도덕적 불균형, 판단 기준의 마비를 가져오게 된다고 생각된다. 조미료에 익숙해진 사람을 몸에 좋다고 싱거운 음식을 제공할 때 좋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에 맞는 새로운 스타일과 회중성 있는 창작물이 필요하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음악적 요인이 너무 현란하면 상대적으로 가사의 전달은 약화된다는 사실이다.  

6) 한국교회에는 교회음악 전문가들의 영향력이 적다. 이것은 교회음악인 자체의 문제점이기도 하지만 교회지도자들의 잘못된 인식과 관련된 것들인데, 메시지를  선포하기 전 단지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음악을 앞세우는 경우들이다. 즉 약 30분 찬양을 한 후 설교를 하면 설교가 더욱 잘 먹힌다는 식이다. 이것을 어떤 분은 미리 불을 땐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교회음악이 어떤 목적을 위하여 도구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교회음악 본래의 목적-찬양, 교육, 메시지 기능-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신교 예배는 메시지가 중심이라는 말은 그 기능을 말함이지 균형과 역할 그리고 효과를 뛰어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예배의식을 통한 효율성을 중심으로 구체적 대안이 필요하다.
또 어떤 목회자는 음악을 의식화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투쟁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모으고 의식화하기 위하여 음악을 사용하는데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사람들도 그 이상의 의식화 방법을 쓴다. 일부 부흥사들은 감성을 자극하고 분위기를 연출하여 회개시키는 도구로 강요한다. 찬양하면 병이 낫는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회중들을 위한 집회에서 또는 일반화하기에는 많은 검토와 준비가 필요하다. 음악이 기복적 신앙의 도구로 활용된다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식의 문제도 있다. 찬양예배를 위하여 칸타타 또는 뮤지컬을 정성스럽게 공연하였다. 회중과의 참여를 위하여 노래하며 연극적 요소를 도입하고 화면을 이용하여 십자가와 예수님의 형상을 비췄다. 그런데 그 평가는 “뮤직비디오 같아”하는 목회자의 반응 겸 평가 한마디로 그 날의 찬양예배는 세속의 늪으로 깊이 빠졌던 것이다. 뮤직비디오가 무엇인지, 찬양예배가 무엇인지 연극적 요소가 무엇인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아름다운 예배를 위하여 각 교회가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많은 교회의 경우 목회자의 이해의 척도가 낮은 것을 어떻게 바꿀까? 빈번한 공연과 새로운 아이디어에 의한 활동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찬양과 경배의 흐름을 보면서 유행성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각 교회의 실정에 맞게 잘 계획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훈련된 교회음악지도자를 리더로 하여 운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종합적 계획 없이 찬양사역을 한다면 하나의 유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교회음악이 대중음악으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교회음악의 전통적 모형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음량이 커서 시끄러운 음악, 또는 악기의 연주나 편성이 음악적이지 않으며, 기호적 태도로만 노래한다면 그것을 정상적 음악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성이 결여되어있는 목적성이 강조된 어떤 음악 형태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찬양의 대상 문제를 논할 때 우리들은 주저함 없이 ‘하나님께 찬양드린다’고 말한다. 이 말은 찬양대의 위치, 찬양대원의 신앙문제, 그리고 예배찬송의 엄격한 기준을 제한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설교자가 그렇듯이 찬양하는 자는 어느 정도 부각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은 강단에 계시기만 한 것도 아니므로 찬양대가 강단을 향하여 노래하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래하는 것만이 바른 예배라고 말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배는 공동체적 행위에 더 의미가 있으므로 찬양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회중들의 공감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또한 회중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성장되기 때문에 회중들에게 찬양이 효율적이고 감동적으로 들리는 것은 중요하다. 찬양의 본질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실용성이 강조된다면 이상적이며 유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음악의 주체가 교회음악 전공자보다 일반음악인들이나 비전문가에 의하여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음악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말과 한국교회에서 일반음악 대학 출신자들이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한국교회는 우선적으로 예배음악에 대한 전문성을 존중하고 가꾸어가야 하며 다이내믹한 교회음악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인재를 적극적으로 양성해야 한다. 한국의 한국교회음악이 예배와 찬양의 본질을 살리면서 다양하고 효율적인 많은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교회음악문화가 더욱 번성하기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하여 교회지도자들은 개인적 성향이나 교회 안에서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문제들을 결정하기보다는 전문가들의 연구를 통하여 개선되었으면 좋을 것이다.
세속음악 분야의 창작에 대한 지원은 지난 2, 30년 동안 급속한 발전이 있었다. 세계적인  작곡가도, 세계적인 작품들도 늘어났다. 그에 비하면 교회 음악의 창작은 보잘 것  없다. 한국교회가 지난날 한국 교회 음악 창작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었던  결과로 교회 안의 작곡가들은 대부분 일반 음악이나 세속음악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많은 교회음악인들이 교회 밖으로 떠났다.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 선지자같은 지도자가 나타나 찬양문화를 바르고 풍성하게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중음악 작곡가 혹은 재능 있는 비전공 작곡가들에 의하여 작곡된 실용음악 유형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도 않는 미국적 교회음악도 포함된다. 한국인에 의한 창작곡이 차지하는 비율은 늘었으나 질적으로 따져 보면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 문제는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 가사와 음악의 관계가 불균형한 상태인 서양음악을 한국 작곡가들이 작곡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심각한 것이다. 반드시 한국어 가사와 음악과의 관계에 따른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교회음악의 올바른 목적을 음악에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찬양대를 일반 음악대학 출신의 음악인이 지휘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그들이 음악을 선곡한다. 그들은 나름대로 신앙적으로 접근하기는 하지만 교회음악 이론 측면에서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3. 몇 가지 보완사항들

1) 한국교회는 ‘예배보다’, 예배드리다‘ 개념의 절충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예배보다’라는 말보다는 ‘예배드리다’는 말이 좋다고 말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 두 말이 모두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말의 보다라는 동사 또는 보조동사는 상황에 따라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일반적으로 초신자의 경우 예배를 참석하여 하나님께 가치를 돌리는 것은 물론 예배에 참여하고 설교를 듣는다. 그렇다면 ‘예배보다’는 말이 예배드린다는 말보다 오히려 더 적절하지 않나하는 생각인 것이다. 다만 예배보다는 표현이 구경꾼 같은 어감을 준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예배드린다는 말도 좋은 말로서, 하나님께 신령하고 경건하게 예배한다라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좋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보다와 예배드리다의 개념과 속성이 조화있게 절충되고 잘 발전시킨다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초신자는 우선적으로 참여가 중요하고 차차 창조주의 가치를 알고 영광 돌리게 된다.
  ‘보다’라는 보조동사는 본래의 의미인 쳐다보다는 의미 이외에 경험과 상태 그리고 참여와 축제적인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며 서로 교통하고 있는 매우 복합적인 성격의 좋은 말이다.
예배드리다(Service)는 동사는 하나님께 헌신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리는 예전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이 말은 의식적인 정중한 뜻으로의 경어이나 성서에 직접적으로 사용된 예는 없고 우회적으로 예물을 드린다. 몸(마음)을 드린다. 사용하고 있다. 의식적인 정중한 뜻의 경어이다.

    예배보다(Worship)-교인들이 예배당에 가서 의식을 참례한다.(禮拜-경례하고 절함)
        맛보다- 경험, 욕보다- 당하다. 경험
        시장보다-일(옛날에는 물건을 사고팔았으나 지금은 사든지 구경만 한다), 구경과
                 참여와 축제적 성격으로서의 보조동사 보다.
        며느리보다- 맞이하다. 얻다. 거느린다.
        예배보다- 워쉽-창조주의 가치를 돌리고 그 분을 전능자로, 왕으로 창조자로 경배함.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난다. 헌신 예전, 서로 교감한다.

2) 예배 성가합창곡의 가사

1) 예배성가(Anthem)와 선곡
예배 성가는 찬양대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는 거룩한 합창음악이다. 그런데 이 예배성가는 성도들이 다함께 부르는 회중찬송과는 내용과 형식 그리고 양식 면에서 다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초기의 예배성가의 가사는 전통적으로는 성서를 기초로 한 내용으로 특히 구약 시편의 내용과 신, 구약 성경의 캔티클(Canticle)을 재구성한 내용이어야만 했다. 예배성가의 구성 형식은 회중찬송보다 더욱 발전되었고 복잡하다.
찬양대는 회중이 부르기 어려운 음악적으로 향상된 성가를 별도로 연습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 말은 회중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받으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기교적인 승화된 음악을 말한다. 이것이 지나치면 회중은 관람객으로 전락하게 되지만 회중들과 잘 조화되면 회중들의 교육적 기능과 잘 어우러져 큰 효과를 내게 된다.
현대 개신교의 예배에서 찬양대가 부르는 예배성가는 기독교적 특색과 함께 효율성이 가미된 실용성이 있는 음악이어야 하되 가사와 음악이 신학적, 음악적으로 검증되고 선별된 것이어야 한다. 검증되지 않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음악과 가사는 노래 부르는 사람들과 회중들을 혼란스럽게 하며 흥미도 잃게 되어 예배에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교회의 지휘자들은 찬양대의 찬양은 ‘소리가 커야 된다.’ ‘끝을 높여야 한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그래야 교인들의 아멘으로 화답하는 소리가 크기 때문이다. 대형교회에서는 전달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큰 소리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또 음악에 따라 모도는 아니지만 끝이 화려한 것도 많다.
그러나 늘 끝이 화려한 음악만을 선곡한다면  예배의 내용과 효과에 대한 고려보다도 단순히 음악적 효과 면에서 따지게 되며 점점 특정 대상을 향하여 찬양하는 결과를 낳게 되므로 이에 대한-예배의 효과에 따라서 절기, 계절 등 예배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다양한 음악을 아름답게 찬양해야 한다는-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2) 가사의 문제점들

(1) 같은 가사로 작곡된 다른 곡의 연주
특히 예배 순서에 마롯데의 주기도를 교인들이 응답송이나 예배 순서의 끝에 제창하는데도 불구하고 봉헌송으로 독창을 하거나 성가대가 예배성가로 선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 예배의 균형을 깨는 행위이다.(사도신경, 시23편, 등의 빈번한 찬양도 마찬가지이다)

(2) 의미가 불확실한 표현
우리가 CCM을 노래하다 보면 가사의 표현법을 다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보혈을 지나(김도훈 곡)’를 말을 놓고 볼 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어떻게 지날까?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부활절 찬송 살아계신 주의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는 찬송가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로 가사를 바꾸어 서술적이며 의미가 분명해졌다. 다음 가사는 예배성가 중의 일부분인데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형태의 가사가 교회 주변에는 많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찾고  주, 언제나 나를 찾아
     우린 서로 만나지 못해 나는 주를 뵙지 못해
     나 언제나 지혜 구하고 주님 지혜 주시지만
     우린 서로 만나지 못해 주의 말씀 듣지 못해 주님 얼굴 보이소서

(3) 잘못된 표현
다음의 번역가사는 정확한 의미전달도 되지 못하며 불분명하게 표현하여 질적으로 시적가치를 저하시키고 있는 예이다.

     완전한 음정과 정확한 박자 쉽고 끝없는 후렴부와
     변함없는 선율, 조화된 화음 완벽한 음들, 이 모두 주 위한 것이라
     모두 맡은 대로 주를 찬양해, 음절들로 찬양하네 소리로 주 찬양하여라.
(필자가 뜻으로 재해석하여 수정해 보면:  정확한 음정, 잘 맞는 박자, 반복의 후렴부, 아름다운 선율, 각자 역할대로 주님 찬-양, 언어로서 찬양-으로 대신 할 수 있을 것이다)

CCM ‘이와 같은 때엔’은 영어의 In Moment like These를 번역한 것인데 영어에서는 ‘이와 같은’이 초점이 아니라 ‘순간’이 초점이다.
예배용 성가로 불리는 다음 가사는 맞는 말인지 아닌지, 매우 수준이 높은 말인지 판단이 필요하다.

      나는 주의 참된 목자요 세상에 주를 전하리 평생에 주만 섬기고 살겠네

3) 오르가니스트도 현대적 예배에 대비해야 한다.

목사님께서 찬송의 반주를 오르가니스트에서 신디 주자로 교체하였다. 이 배경은 전통적 예배에서 탈바꿈하여 찬양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자하는 의도였다. 예배순서는 주보에 있는 순서대로가 아니라 자유스럽되 찬양을 많이 하는 형태였다. 따라서 복음성가나 CCM을 많이 삽입하여 부르게 되었고 일어서고 앉고를 반복하는 형태로 찬양방식도 바뀌게 되었다. 오르간은 가격이 높은 훌륭한 악기이지만 신디의 음색에 밀려나게 되었다.
신디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목회자의 대중적 음악에 맞는 음색이라는 판단에서이다. 또 풍부한 소리를 내는 등 다양한 기능이 있다고 말한다. 또 신디는 운반이 용이하여 장소에 대한 제한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풍부하지 못하고 빈약함은 왜일까!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은 어디서 올까?
오르가니스트는 찬양과 경배 집회에서 복음성가 혹은 CCM을 함께 부를 때 느껴지는 자유스러움과 압도적으로 분위기를 인도하는 그런 모습 이상의 효율성과 아름다움, 역동성, 그리고 편리함을 제공하고 흥미를 줄 수 있도록 훈련되어지고 개발되어야 한다. 오르간의 중심적 역할은 서양의 전통음악이나 순수음악을 바탕으로 연주가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대중적 음악형태나 어휘를 적용할 수 있도록 넓힐 필요가 있다. 오르가니스트의 기능의 확대-건반화성 능력, 오르간으로 CCM 반주 예배 분위기에 맞는 사운드-가 요구된다.

4) 창작이 기초가 되는 각종 프로그램들

예배에 있어서 음악이 차지하는 기능과 역할 그리고 비중은 크고 매우 중요하다. 성가대에서는 빈번하게 좋은 교회음악을 선곡하고 연습하여 아름다운 찬양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한다. 교회마다 새로운 생각들을 모아서 연습도 하고 차별화된 연극적 연출도 하여 하나님께 드려진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은 물론 좋은 교회음악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어떤 형태이건 창작이 기초를 이루게 된다.
  교회음악의 꽃은 성가대의 합창이나 독창자의 독창, 회중 찬송, 오르간 음악, 기악음악 등 연주와 관련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꽃은 피우기 위한 토양이며 뿌리, 줄기에 해당하는 창작이 빈약하다면 아름다운 꽃이 제대로 피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창작의 저변 확대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아름다운 음악의 꽃을 피우기는 분명히 어렵다. 아름다운 꽃들은 오랜 동안의 노력과 더불어 많은 비용을 투자한 결과로만 피어나는 것이다.
다음은 연극적 요소가 가미된 절기용 칸타타예배에 대한 연주 상황이다.

  “지휘자 마치는 사인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은혜로운 목소리로 아멘과 함께 아쉬움의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옆에 앉은 낯모르는 한 여성 지휘자는 연신 악보에 연주법에 관한 메모를 표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성금요일 혹은 수난 주일에 찬양예배로 드려질 수 있는 쉽고도 아름답고, 가슴 저리는 주옥같은 합창곡들‘이었다.

음악지도자는 성도들이 무슨 찬양을 어떻게 드릴까하고 기대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성가대의 찬양하는 마음과 열기가 교인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일 년에 적어도 3-4회 이상은 잘 조정되고 기획된 찬양예배를 드려야 한다. 오후예배 또는 저녁예배의 경우 의례적 예배순서에 의한 무늬만 찬양예배라면 의미가 없다. 이를테면 예배 시작 전 잘 모르는 찬송을 부르든지, 예배 시작 전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부르든지, 특송이라 하여 가족창이나 기관별로 돌아가며 찬양하는 정도의 비전문화된 순서로는 회중들의 찬양하는 마음을 높일 수 없다. 한 번 정도 미리 모여 찬송가를 연습하는 식으로 준비한 찬양은 의미가 없다.

다음은 예배 관련, 또는 교회음악인 양성을 위하여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행사들이다.

  예배 찬양의 다양성-찬양자의 위치 조정, 음향 조정 등으로 찬양예배의 다양성을 활용한다,
  성가대, 독창자, 회중과 함께 찬양하는 예배의 구상
  독창, 중창, 4중창,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와 함께하는 예배의 구상  
  찬양대와 악기를 활용하여 데스칸트 연주 등 다양성을 활용하여 아름다움과 은혜로운 분위기를 회       중들에게 보여 준다,
  연극 예배, 영상 예배 및 편의 제공,
  찬송 축제, 가스펠 축제, 찬양 축제의 구상,
  대림절 촛불예배, Nine lessons, 각 절기마다 칸타타 연주,
  기관 경창 대회, 교구 경창 대회, 가족창 대회 등 목회적 활용
  초청합창단과 함께하는 예배, 다른 성가대 또는 교회와 교환예배로 서로 아이디어를 교류함.
  말씀과 찬양의 예배, 회중이 참여하는 예배를 기획.
  성가합창제, 선교음악회, 특별음악회에 참여
  주변 직장인과 지역주민을 위한 정오음악회, 선교를 위한 음악회들을 기획
  어린이 합창단, 청소년합창단, 성인 중창단, 장로중창단, 권사중창단,
  기-타 동우회, 하모니카 앙상블,
  음악학교 개강(음악이론, 피아노, 성악(발성), 바이올린, 플루트, 색소폰, 드럼)
  


4. 맺는 말

한국 교회가 더욱 바로 서고 질적으로 성장하려면 좋은 교회 음악 문화의 창달에 큰 힘을 기울여야 된다. 더욱 아름다운 찬양예배를 드리며 음악선교와 교회 음악 교육이 다양하면서도 성실하게 이루어질 때 한국교회는 다시 큰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과거와 상황이 다르다. 컴퓨터와 매스컴의 급속한 발달로 삶의 패러다임과 사회 구조, 그리고 개인의 사고방식이 바뀌었다. 개인은 더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고 대중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찬양인도와 관계되는 대중음악인들이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경우도 늘어났다.
전통적 교회음악은 과거의 방법에서 새롭게 진화되어야 한다. 사회의 변화에 따른 대처 즉 음악 양식이나 연주 형태의 변화가 필요하다. 개인이 존중받기 위하여 흥미가 있어야 하고 개인을 참여시켜야 하고 다른 것도 수용해야 하며 모두를 포괄할 수 있도록 다양해야 한다. 획일화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의 방법으로 현대인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음악은 전통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사회구조는 바뀌어도 인간 본연의 가꾸기 위한 음악문화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음악을 통하여 인간교육이 되도록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야 한다. 하향평준화도 필요하지만 전문적 그룹의 육성이 더 중요하다. 즉흥성은 효율성이 검토된 부분만 활용한다.


여건 조성을 위한 제안들

  1) 한국교회는 음악예배를 기획하고 준비할 수 있는 기획자, 음악목회자, 전임 작곡자나 편곡자가 있어야 하며 이를 양성해야 한다.
  2) 예배의 다양성을 위하여 한국교회에는 성가대가 중심이 되어 다양하고도 아름다우며 연극적 요소 등 좋은 아이디어를 활용한 창작 작품을 연주하는 형태의 찬양예배가 늘어나야 한다.
  3) 오르가니스트의 역할이 증대되어 효과적인 예배인도와 현대적 예배의 다이내믹을 살릴 수 있도록 양성되어야 한다.
  4) 전통음악과 CCM을 균형있게 인도할 수 있는 찬양인도자 양성이 시급하다.
  5)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배에도 재즈나 CCM만을 부르는 풍토를 개선하여 찬송가 등 전통적 교회음악을 가르치고 새롭고 다양한 교회음악의 장르를 개발하여 안내하여야 한다.
  6)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할 때 교회음악으로 승화하여 연주할 수 있는 신디 주자와 드럼 주자를 양성해야 한다.
  7) 절기 또는 행사에 필요한 창작 음악을 개 교회, 교단, 출판사, 범 교계 단체들이 위촉하고 연주하는 형태가 많아져서 좋은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8) 또한 각 교회, 교단이나 신학대학, 교계언론 단체에서 주관하는 성가합창제에서도 한국인이 작곡한 창작곡의 연주를 의무화하는 것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예산 지원도 필요하다.
  9) 끝으로 한국 교회음악협회는 새로운 찬양예배의 모형과 아이디어를 제시-소개하고 창작의 방향을 이끌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결국 교회음악인의 문제이다. 목회자 교육이 부족 운운은 2차적인 문제이다. 교회음악의 원리에 잘 맞으며 효과적이면 목회자나 한국교회 교인들은 따라 올 수밖에 없다. 저작권 문제를 잘 활용하면 경제적 효과도 누릴 수 있다.